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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건강 칼럼 <마음이 모이는 곳> 제21-1호 '겸손의 미덕'
  • 관리자   |   2021-04-01 11:11 조회수 : 433

동구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 백용매

1980년대에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의 ‘배짱으로 삽시다’라는 책이 출간된 적이 있다. 한국인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소심증을 분석한 책으로 출간 즉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3년 동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시작된 대인공포증 클리닉은 당시 2천여명을 진료하며 단일 클리닉으로는 세계 최고의 환자 방문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많은 한국인들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소심증이라는 신경증 증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예의범절을 지키는 일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였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속담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선비들의 고결한 마음가짐을 비유한 말이리라. ‘춘궁기에 사방 십리 이내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경주의 최부자 집 가훈은 재산 많음을 자랑하기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양반가의 실천적 미덕의 소중함을 일깨어주는 대목이다. 즉, 내 것을 자랑하기보다 타인의 올 곧은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의 순기능이 건전한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체면'문화가 주는 역기능적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항상 자신의 본심을 숨겨야하고,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하며, 하고 싶은 욕망과 충동을 억제해야하기 때문에 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이 과정에서 남의 눈치를 봐야하는 소심증, 열등감, 죄책감은 한국인의 집단적 대인공포증을 유발하는 중요 요인이라는 것이 이시형 박사의 주장이었다. 더 이상 이런 소심증이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남 눈치 보지 말고, 소신을 가지고 배짱으로 살자는 구호는 1980년대 당시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폐해로 상처를 받던 남성 대중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치유하는데 충분한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여년이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사회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능력과 역량을 가장 중요시하는 경쟁사회로 접어들면서 부모의 역할도, 자녀를 기르는 양육태도도 이전과는 확연히 바뀌었다. 남의 곤란한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보다는 내가 우선이고, 내 자식이 최고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성공보다는 자신만이 성공과 탁월함을 성취하고자 꿈꾸며 인정받기를 열망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매우 자연스럽고 건강한 심리적 현상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자신감을 배태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며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의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사랑이 지나치면 웅대한 자기상에 집착하여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비현실적으로 과대평가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특별한 대접과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항상 무한한 성공, 권력, 탁월함, 아름다움 또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나친 사랑과 과잉보호, 찬사를 받아 비현실적인 자기개념과 웅대한 자기상, 일방적인 특권의식과 자기중심적인 대인관계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자기애성 성격특성을 가진 사람이라 부른다.

자기애성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일들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뒷받침할만한 업적이 없음에도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성공과 권력, 탁월함에 집착한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 하고 자신의 능력과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분노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갈등들이 자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능력과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그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쉽게 관계를 단절해 버린다.

이들은 자신이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고, 껍질뿐인 관계와 껍데기뿐인 삶을 살아가기에 건조한 삶에서 발버둥치지만 마음의 위안은 되지 않고 자주 공허감에 시달린다. 이들이 도박이 빠지거나 약물에 의존하거나 탐닉한다면 아마 관계단절과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공허한 허기짐을 채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리라.

한국사회가 체면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자기애성 성격시대로 변화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늘고 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조직에서도 힘든 일은 자신의 몫이 아닌 타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힘들고 궂은 일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타인들이 해야 할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생색나지 않은 일은 더 이상 내 자식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좌절을 견뎌내고 인내하는 미덕을 가진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군대생활처럼 힘이 드는 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일,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직장에서는 잘 견뎌내지 못하여 중도에 그만두거나 적응력 부재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훼손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한 시대의 사회적 성격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격특징들이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한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성격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분명 자기애적 성격특성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 생각이 언제나 옳고, 내 생각은 항상 옳아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 바로 자기애적 사회성격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극단적인 자기애적 특성은 없는지, 나만이 옳고 나만이 중요하다는 경직된 인지적 틀로 나를 가두고 있지는 않는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표면화되고 있는 자기중심성,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힘든 일을 기피하려는 경향, 좌절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자신만 소중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덕목으로 겸손의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성공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행동은 타인과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나만의 성공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겸손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지혜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는 것도 인생이다’라는 책이 있다. 이 시대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실패담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성공은 실패를 통해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할 수 있는 내면의 선물이다. 자신의 성공을 알아주기만을 바라기보다, 자신의 자식만 오직 성공하기를 기대하기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 실패를 통해 당당히 일어설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고,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동구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 백용매